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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울증 치료기

조울증 10년을 돌아보다

 

 

 

 

조울증만 10년? 25년?

 

저는 올해 생일이 지나면서 만 4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제목도 '조울증 40년을 돌아보다'가 더 적당할 수도 있고, 제 기억에 조울증이 발병한 것으로 짐작되는 고등학교 1학년(1994년)을 기준으로 따져 보면 25년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조울증 진단을 받은 2009년을 기준으로 따져 본다면 10년째가 되는 해라서, 그냥 제목을 저렇게 정했습니다.

 

제가 조울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대처를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딱 10년 하고도 50여 일이 지났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증과 울증을 왔다 갔다 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좀 더 일찍, 첫 번째 발병 때 이 병을 알았더라면'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첫 발병 때 치료하면 완치(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 곱씹어 봐야 마음만 아프고 소용이 없으니 이제는 그런 생각도 안 하려고 합니다.

다만 정말 상황을 달라지게 만들 수 있었던 요소들이 잘 안 맞아 떨어진 것만큼은 정말 안타깝네요.

예를 들면, 친척 중에 비슷한 정신과 병력이 있는 분이 많다든가(가족력),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이라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중 누구도(제가 조울증 인증을 한 지 1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진심 어린 관심과 걱정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 제가 약간의 경조증 시기이기 때문에 과장해서 말하는 게 아니고, 다년간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사실입니다. 사실 조울증 치료에 가장 중요한 점이 가족의 도움인데(본인이 병식이 있고 치료 및 관리를 위해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 그 도움이 없다시피 하니까 정말 힘드네요.

 

우울한 시기에는 가족들은 편할겁니다. 방구석에서 나오지도 않고, 조용히 좀비처럼 지내니까 자기들이 괴로울 게 없거든요. 근데 조증기가 돌아오면... 그간 나를 방치했던 사실을 포함하여 부모들에 대한 원망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너무 많이 부딪히게 됩니다.

한 번은 이런 패턴이 너무 괴로워서 자취하려고 뛰쳐나가도 봤지만, 앞선 글들(이 블로그의 '나의 조울증 치료기')에서 쓴 것처럼 우울기를 혼자서 극복해 내지 못해서 다시 이 hell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울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심각한 병은 가족의 도움이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환자 본인의 심신이 지쳐 있기 때문에 스스로 케어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유독 정신과 계통의 병들은, 일단 스스로 신체를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여서 그런지 방치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방치.'

가슴 아픈 말입니다. 설령 가족이 의도치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방치당하고 있는 정신과 환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병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죠.

 

하긴, 병이 생기기 전에도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자유롭게 방목식으로 키우는 느낌이었습니다. 음... 엄밀히 말하면 '방목'이 아니고 '방생'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방목과 방생은 차이가 큽니다.

방목은 최소한 울타리가 있거나, 목동이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다니며 천적으로부터 보호하지만, 방생은 그냥 자연에 풀어놓는 거잖아요. 특정 종교인들의 경우 좋은 의미에서 방생을 하는 일이 있는데, 사실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동물들이 방생'당하면' 금방 죽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건 사람도 크게 다를 게 없죠.

저 역시 어린 시절의 부모의 자유방임주의를 편하고 좋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희 부모님은 어떤 '선'을 넘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거죠(안 한 건지도).

이 또한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루빨리 이 집을 탈출해야 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해졌습니다. 최근에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서 죽어야겠다', 이런 심정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환우들의 가족 분들이 계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관심을 잃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게 치료 과정에서 정말 큰 역할을 합니다. 즉각적인 효과는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장기적으로 조울증을 극복하는 길은 가족의 '적절하고 지속적인, 하지만 과도하지는 않은 관심',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합니다.

일견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이상 행동이나 말을 해서 가족인 당신을 미칠 것 같게 만들지라도, 최대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도 그렇고 조울증 환자들은 아픈 사람들이에요.

저희 어머니는 '환자라고 유세 떠냐?' 이런 말씀도 하셨지만, 유세가 아닙니다. 그냥 팩트예요, 팩트. 암환자가 병원 침상에서 힘들다, 괴롭다 하며 고통을 호소하는데, 거기다 대고 '환자라고 유세하냐'하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최근에는...

 

각설하고, 최근에 다시 경조증 시기에 접어들면서 몇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1. 돈 모으기

탁송 일을 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출퇴근 자유롭고 건당으로 받는 일이라 저하고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규직이나 4대 보험 보장되는 회사에 다니는 것에 비하면 많이 불안정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장기간 회사를 다니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월세 보증금 모으기에 성공하면 최단기간으로 탈출 Exodus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쓸데없는 지출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 중이고요. 무엇이 됐든 사기 전에 세 번씩 생각합니다.

'이게 지금 정말 필요한 물건인가? 정말로 필요해? 이미 가지고 있는 걸로 해결 가능한 건 아닌가?'

이렇게요.

 

2. 사소한 실패(1)

10년 지기인 여자사람친구와 다퉜어요(프라이버시 때문에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습니다만).

다만 아쉬운 건, 서로 좋은 대화 상대였고(한 번 통화하면 2~3시간은 기본으로 수다 떨기가 가능한),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상대의 사정을 어느정도 알아서 의지가 됐었는데, 아마도 제가 상태가 예민해지니까 평소에는 그냥 넘어갔던 말들을 튕겨냈던 모양입니다.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이것도 병증이라, 좀 더 조심해야겠다 하고 반성해 봅니다.

 

3. 사소한 실패(2)

경조증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또 다른 일입니다. 제가 1년 넘게 참여하던 모임이 있었는데, 두 달여의 우울기가 지나고 오랜만에 모임에 가서 한 행동과 말을 불편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너무 오버했는지... 당분간 '일 관계로는' 빠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음... 반성해 봅니다. 후회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반성하는 것(만약 다르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은 의미 있고 발전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비슷한 경우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덜 실수하기를 바라면서.

 

 

결론

 

25년여간 조울증을 '안고', '업고' 살아오다가, 몇 년 전부터 조울증을 '입고wear'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은 그렇잖아도 힘든 병인데, 등에 지고 가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초기 치료에 실패한(아니, 아예 병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저는 아마도 평생 이 병을 가지고 가야 할 겁니다.

죽을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한때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고, 이럴 거면 왜 태어나게 했나, 하고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고, 병을 이겨내지 못하는 저 자신을 욕하며 자괴감에도 빠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달 전만 해도 누군가 좀 죽여줬으면... 내지는 건널목에서 교통사고 안 나려나... 이런 생각을 하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발전적이지요.

그리고 기왕 사는 것, 즐거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가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정도 살아 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때문에 노력에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울증을 잘 달래서 끝까지 가 보려는, 노오오오오오오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며칠 날씨가 가을같아서 너무 좋습니다. 대신 일교차가 심하니까 건강 조심하세요.

그럼 늘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