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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관련 정보/조울증 관련 자료

[책]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제: "An Unquiet Mind"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영화 "Touched with Fire"에 등장하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우리말 제목 - "사랑에 미치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자 본인도 조울증 환자이다. 의학 전공 교재인 <Manic-Depressive Illness: Bipolar Disorders and Recurrent Depression>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목차:

  • 프롤로그
  • 제1부: 저기 저 푸른 창공
  • 제2부: 별로 달갑지 않은 광기
  • 제3부: 이 약은 내 사랑이니
  • 제4부: 동요하는 마음
  • 맺음말

이 책에 관해

 

첫째, 저자 본인의 경험담으로 조울증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이다.
둘째, 저자가 조울증과 싸워나가며, 바로 그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제목과 내용의 번역이 아쉬웠지만, 조울증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쉽고 자세하게 풀어 낸 책이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서 본 조울증

 

새벽 두 시, 주울병 환자인 나에게는 그 시간에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 메디컬 센터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나는 그 새벽 시간에 병원 주차장 안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조울병 환자 특유의 끝없이 넘쳐나는 정력을 주체하지 못해 상하 좌우로 마구 내달리고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닌 나는 숨찬 줄도 모르고 헐레벌떡 달리고 있었고, 그리고 서서히 미쳐 가고 있었다. 

 

책 첫머리에 저자의 극단적인 조증 증세가 묘사된다. 조울증 환자는 조증 증세가 나타나면 넘치는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는데 그 모습을 본인의 경험담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마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내달리는 정신 상태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내가 조울병의 증상을 처음 경험하게 된 것은 고교 3학년 때였다. 

 

저자의 경우 꽤 일찍 조울증이 발병했는데, 내 경우 대학교 2학년쯤 발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일찍 발병했던 것도 한 원인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 진입이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너무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병원을 찾았고,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공인된(?) 조울증 환자가 된 것이다. 그게 첫 발병 후 12년이 지나서였다. 조울증은 초기 진단과 치료가 굉장히 중요한데, 골든 타임을 놓쳐도 너무 놓쳤다. 그나마 저자의 경우는 전공인 정신 병리학과 환경 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진단을 받는다.

 

나는 충동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래서 현대식 건축물을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산타모니카에 있는 초현대식 아파트에 입주했다... 또한 그 아파트에서는 멋진 바다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그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처발랐지만).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많은 돈을 낭비하는 것 - 정신병리학 교재는 이런 현상을 "억제할 수 없는 구매충동에 굴복하는 행위"라고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 은 조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러나 조증 상태에서 마구 충동 구매한 물품대는 국세청에서 인정하는 의료비나 경상비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조증 후에, 우울증이 되었을 때 더 심해지는 아주 좋은 이유가 된다.

 

 

조증 시기에는 충동구매 등 과소비를 하기 쉬운데, 대개 본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수준이라는 것이 문제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고통을 주기 마련이고, 조증에서 벗어났을 때 자기 혐오를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나는 무서운 속도로 내 인생을 질주하고 있었다. 하루 20시간 가까이 일을 했고 밤에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청각은 놀라울 정도로 예민해졌다. 특히 음악을 들을 때면 소위 절대음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호른, 오보에, 첼로 등의 개별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한 소절 또는 음절 전체를 따로 또는 같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一)이 다(多)가 되고 다가 일이 되는 입체적 종합성, 명료성, 추상성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꼈다...

 

조울증 환자에게는 기분이 뜨는 조증 시기, 그리고 기분이 가라앉는 울증 시기가 있는데(이런 시기들을 전문용어로는 에피소드라고 부른다), 위의 문단은 조증 시기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감각과 감수성이 한없이 예민해지고, 남들에게 없는 천재성 같은 것이 있다고 느끼기 쉽다.

 

그렇다면 그런 꿈 혹은 환상은 "실제" 있었던 것인가? 물론 과학적으로 검증되는 "실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꿈 혹은 환상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졌는가? 라고 물으면 정말 그랬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 심리학자에다 과학자이고 또 조울병 관련 연구논문을 많이 독파했기 때문에 리튬을 복용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로부터 조울병이라는 최초 진단을 받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처방된 약물을 지시대로 복용하지 않으려 했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조울병이 진짜 질병 즉 뇌에서 일어나는 기질적인 병이 아니라고 근본부터 부정하는 태도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기분이 인생 혹은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아주 절대적인 요소인데, 거기에 난조가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리고 기분과 행동에 극단적으로 정신병적인 징후가 보여도 적당히 둘러대려 한다...

 

조울증 환자가 약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조울증 환자들이 약을 끊는 일이 잦다. 나 또한 진단을 받은 이후 두 차례 약을 끊은 시기가 있었다.

 

정신병을 앓아 고생은 했지만 결코 어리석지는 않았던 시인 로버트 로웰은 인생에 대하여 순진한 희망 사항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로웰은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불빛이 보이면 그건 햇빛이 아니라 다가오는 기차의 불빛이지요."

 

조울증은 조증과 울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환자는 치료 과정에서 좌절감을 느끼기 쉽다.

 

 

학부 학생이었을 때, 맹인학생과 통계학을 같이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학생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심리학과 빌딩의 지하실에 있었던 나의 작은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크게 안 것도 아니면서 맹인의 삶에 대해 좀 알았다는 건방진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학생이 이렇게 내 연구실에서만 만날 것이 아니라, 학부 도서관에 있는 맹인 전용 도서실로 좀 찾아올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좋다고 했다.
나는 어렵사리 물어서 그 도서실을 찾아내어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안이 너무 캄캄해 깜짝 놀랐던 것이다. 전깃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데다 동굴처럼 조용했다. 그런 방안에 대여섯 명의 맹인 학생들이 앉아 점자책을 읽거나 강의 시간에 녹음해 온 교수의 강의 테이프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 황량한 광경을 쳐다보면서 척추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와 같이 공부하던 학생은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 있는 데로 더듬어 가더니 불을 켰다.

그 순간 나는 유리알처럼 영롱한 한 개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좀 안다고 건방진 생각을 했던 맹인 학생의 세계에 대해, 실은 아는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하나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안다고 판단해 버린 것이다.
안정된 기분과 예측 가능한 일상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면서, 내가 그런 안정된 세계를 잘 모르고 있고, 또 그런 세계에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여러 모로 나는 그런 정상적인 세계에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정상인이 조울증 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반대로 조울증 환자는 일상적인 생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사건이다.
위 문단의 에피소드처럼, 우리는 시각장애인이 그저 보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하지, 캄캄한 시야 속에서 살아간다고는 잘 상상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조울증 환자가 치료를 통해 정상인의 감각을 되찾으면, 환자 본인으로선 정상적이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설사 사랑이 완치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해도 가장 강력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존 던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순수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사랑은 오래 가고 또 날마다 자라난다."
(존 던(1573~1631)은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

 

주위의 관심과 애정이 조울증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

 

과연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매도가 정신병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완화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정신병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교육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리튬, 항경련제, 항우울제, 항정신병 약물을 개발하여 정신병 자체를 치료함으로써 사회의 인식을 고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또는 성공적으로 치료를 하여 일반대중과 언론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가령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프로작이라는 약제가 개발되어 일반 여론과 사람들의 인식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

 

조울병(manic-depressive illness)은 양극성 정동장애(bipolar disorder)나 기분장애(mood disorder)로 불리기도 한다.
본문에서 "정신병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라는 것은 영어권에서 manic-depressive illness 대신 bipolar disorder라는 용어를 선호한다는 뜻인듯하다. 아무래도 manic, 이러면 '미친', '광적인'이란 뜻이 연상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용어 자체보다, 조울증의 치료법을 더 발전시켜 사회적인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것 같다.

 

조울병이 유전하는 질환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아주 복잡하고 또 까다로운 정서적 문제를 야기 시킨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 조울병 환자는 끔찍한 모욕감과 죄의식을 본의 아니게 느끼도록 강요된다...
...그러자 그 의사는 난생 처음 들어본 아주 냉랭하고 잔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혀 의심치 않고 마치 신탁을 대신 말해 주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돼요. 조울병 환자니까." 나는 속이 니글거릴 정도로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야비하게도 나와도 나 자신은 지켜야 할 태도가 있기 때문에, 상대의 그런 도전적인 태도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넌지시 이렇게 물어보았다.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내가 조울병 환자이기 때문에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조울병 환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요?"
나는 예의를 지키려 했지만 목소리에 비아냥이 배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의사는 내 비아냥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눈치채지 못했는지, "둘 다 해당된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조울증이 유전된다는 사실 때문에 2세에 대해 회의적인 환자 본인이나 일반인이 있다.
이 슬픈 에피소드는 표현에서조차 저자가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희망은 있다

 

여러 번의 조증기를 겪으면서, 조울병의 권위자가 되기까지의 일화와 생각을 담은 이 책은 다름과 같이 갈무리하고 있다.

조울병은 참으로 복잡한 병이다. 특히 조울병의 한 증상인 우울증은 말, 소리, 이미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이혼한 사람, 실업자가 된 사람, 애인과 헤어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상실을 경험했으므로 우울증이 어떤 것인지 이해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실의 경험에는 그 안에 어떤 느낌이 있다. 반면 우울증은 아무런 느낌도 없는 텅 빈 상태로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겪은 그 무수한 조증은 내 인생에 독특한 감각, 느낌, 사고방식을 가져다 주었다...정신병적 상태에서도 내 마음에 새로운 미지의 구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했다. 그런 미지의 구석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래서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황홀했다... 어떤 이미지는 너무나 기괴하고 추악하여 차라리 그런 이미지가 없었더라면, 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늘 내 마음에는 미지의 새로운 구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힘으로 정상적인 나 자신을 되찾았고 약물치료와 사랑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녹초가 되어 버리는 것을 상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에는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구석이 늘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으므로.

 

희망을 놓지 말라는 저자의 응원.

덧붙여: 영화 "사랑에 미치다"에 관한 이야기

 

Touched with Fire

(출처: www.imdb.com)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남녀 주인공이 있다. 둘은 심한 조울증 때문에, 가족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정신 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비슷한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운명의 상대로 생각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감정의 기복이 엇갈리기 시작하면서, 둘의 사랑은 결국 파국을 향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여자는 치료를 결심하고 남자를 설득한다. 이때,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책의 저자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다(재미슨 박사 본인이 출연한다). 남자는 조울증 치료제(리튬)를 먹으면 둔해질 것을 걱정하는데, 저자가 말한다.

 

당신은 예술적 감수성과 열정에 대해 걱정하고 있군요. 리튬을 복용해도 개성이나 재능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아요. 통제불능 상태야말로 화재와 같은 것인데, 약을 먹으면 재능을 잃지 않고도 불을 다스릴 수 있어요. 내 기분 상태가 정상이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지만, 지금까지 나는 한없이 행복하고 전보다 더 생산적이었어요. 무언가를 만들고 글을 쓰는 데 자신을 더 신뢰하고 있고, 제 삶의 모든 면에서 리튬은 선물과도 같았어요.

 

즉, 약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나도 의사로부터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심리적 저항이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책의 인용에서 나왔듯이, 약을 먹지 않고 다른 치료법만으로는 완치가 어렵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우리 모두 열심히 처방받은 약을 먹자. 이것은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을 거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고:

 

Touched with Fire (Free Press)

Touched with F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