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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울증 치료기

나의 조울증 치료기(1)

 

블로그 공지사항에 가급적 개인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예외 카테고리를 하나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저의 조울증 치료 과정을 보고,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2. 조울증이라는 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알려 드리는 것이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3. 증상의 변화와 그에 따른 대처 방법에 대한 힌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인터넷 검색에서 쏟아지는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사례를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조울증의 발병과 진단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연재 형식으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길이는 얼마가 될 지 아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블로그 방문자들께서 조울증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을 알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이 있는 만큼, 이 글에 담기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므로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점을 고려해 읽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히스토리

 

먼저 (조울증과 관련된) 저의 과거사부터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과거를 알아야 그 사람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공부에 지친 저와 일부 친구들의 일탈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술을 마신 것이 고1 때였는데, 저는 생일이 빨라서 당시 만 나이로 15세였습니다. 조울증이 발병한 것은 이로부터 2년 정도 후의 일이었지만, 이른 나이부터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어쩌면 조울증 발병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등학생의 첫 음주치고는 주량을 많이 넘어서까지 마시는 편이어서, 한번은 한겨울에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학교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길 때까지 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처음 술을 배울 때부터 폭음하던 습관이 대학교 때는 더욱 심해졌죠. 그리고 1학년 말 겨울, 최초의 조울증 발병이 있었습니다. 먼저 찾아온 것은 심한 우울증이었는데, 당시에는 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냥 학기 중에 공부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조울증 진단을 받고 나서야 이 시점이 조울증의 시작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때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수년에 걸친 무절제한 생활도 조울증 발병,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데 한 몫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주변 친구들도 '쟤 요즘 왜 저리 막 나가지?' 하고 말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사는 게 바쁘니... 가족이 아니면 보통 일일이 신경써주기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일단 조울증이 발병하자, 몇 달 간격으로 기분이 한없이 떴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다가를 반복하는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학점은 엉망이 되고, 낮밤이 바뀌어 밥보다 술을 더 찾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군대

 

조울증 진단을 받으면 군대 면제가 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현역으로 갔습니다. 군대 생활 중에도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면서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별 사고 없이 제대할 수 있었습니다. 복학 후에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조증이 유지되어, 그 전에 술 먹고 노느라 망쳐놓은 학점을 거의 평균 수준으로 만회할 정도였습니다.

 

여행

 

졸업 후, 몇 달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견문을 넓히라고 지원해 주신 부모님께는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여행 중 다시 우울증이 와서, 후반 2개월 정도는 정말 아무 감흥 없이 시간을 때우는 시기였습니다. 어렵게 온 장기 외국 여행 중 몇 달을 그냥 터덜터덜 방황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아깝습니다. 하지만 우울증인줄 모른 채 찾아온 우울증에는 정말 대책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진로

 

원래 이과 전공이었는데, 여행 후 진로를 완전히 바꿔서 애니메이션을 하기로 마음먹고 2년 동안 애니메이션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졸업하고 취직도 잘 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어찌 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직장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동료(질이 굉장히 안좋은 사람이었습니다)가 관련된 어떤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엄청난 조증 폭발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직후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버렸습니다. 결국 한 달 정도 버티다가 사표를 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럽고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 두 번째

 

퇴사 후, 캐나다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여동생에게 찾아가서 얹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침 동생 집에 빈방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나가게 된 것이었는데, 잠시 바람 좀 쐬고 기분 전환을 하면 기운을 차릴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사실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하지만 애써 캐나다까지 가서 두 달 정도, 거의 온종일 잠만 자고 밥 먹거나 동생과 이야기할 때 외에는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나마 동생이 키우던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외출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리고 그 2개월이 지나자 다시 조증 폭발이 찾아옵니다. 동생 집 근처의 술집이란 술집은 다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다녔습니다(이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값만큼은 조달이 가능했습니다). 술집 안 가는 밤이면 거실에서 혼자, 혹은 동생과 함께 맥주를 홀짝거렸습니다. 일단 술을 마시니 또 폭음이 시작되었죠. 그러다가 비자 만료일이 다가와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첫 진단

 

캐나다에서 폭발한 조증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이어져서, 스스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큰 사고를 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친구 중에 정신과 전문의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상담을 했더니, 증상을 듣자마자 입원하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바로 입원했습니다. 따져 보면 대학 때 처음 발병한 이후 1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원한 날짜는 거짓말같이, 4월 1일 만우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그때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제 처지가 굉장히 서글펐습니다. 정신병이라니! 하고 말이죠.

 

 

 

병식

 

"너 자신을 알라"

 

병식(Insight, 환자 스스로 병에 걸려 있음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의 병을 치료할 때 가장 기본이면서 또한 출발점이 됩니다. 특히 정신 질환의 경우 병식이 있느냐 없느냐로 치료 예후가 많이 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경우 발병으로부터 첫 진단까지 13년이 걸리긴 했지만, 저처럼 10년 이상 되는 경우가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인지도가 많이 낮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드디어(!) 병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 경우에는 필요성을 느껴 스스로 입원했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랄까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조그마한 긍정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흔히 하는 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니까요.

 

 

 


 

첫 진단까지 13년요?

이제부턴 병과 싸울 시간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답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