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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울증 치료기

나의 조울증 치료기(마지막회)

들어가며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이겠죠.

마무리를 잘 할 수 있길 바라면서... 출발합니다!

 

 


 

 

심해어의 심정

 

그간 발버둥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저의 자존감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백기를 들고 부모님 집에 돌아온 저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고 자연히 사람도 만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인터넷을 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中>

 

마치 캄캄한 해저에서 천천히 기어 다니는 심해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방구석 폐인'으로 '잠수'를 타던 시기였지요.

요 몇 년간 벌어진 사건 사고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랫동안 계속된 우울증은 마음의 휴식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료를 다시 시작하다

 

해가 바뀌어 또 한 번 조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경우 불과 며칠 사이에 울증에서 조증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조증 상태가 된 후 깨닫는 게 늦을 때가 많았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며칠만에 조증이 왔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병원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져 보니 4년이나 약을 끊고 지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경험을 한 뒤에야 약 없이는 이 병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셈입니다.

저와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약 없이 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무모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극구 말리고 싶습니다.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약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러기엔 시행착오에서 오는 고통과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새로 다니게 된 병원은 처음 다닌 병원과 비교해 몇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Designed by Freepik)

 

우선 거리가 가까웠습니다.

뜬금없지만... 헬스 하는 분들, 헬스장을 선택할 때 첫 번째 조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바로 집(또는 직장)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피곤하거나 좀 귀찮을 때라도 꾸준히 운동하러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병원 선택에서도 어느 정도 해당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병원이 멀면 일단 가기 힘듭니다(특히 우울증이 왔을 때는 더 그렇습니다). 한참을 걸려 병원에 도착하고, 진료를 기다리고, 약을 처방받아 다시 집에 돌아오는 과정은 시간 낭비도 많습니다. 경우에 따라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병원이 가까우면 급한 상황(갑자기 기분 변화가 오거나, 혹은 약 부작용이 심해지는 경우 등)에 대처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둘째로 진료 시간이 충분히 길었습니다. 대학 병원의 진료 시간이 5~10분에 불과해서 충분한 상담을 못 했던 것에 비교하면 치료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요소였습니다(대학 병원은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 저와 잘 맞았습니다. 이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신중한 치료 방식도 그랬고, 제 상태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으며, 처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병에 대한 제 자신의 태도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 이 조울증이 한두 번 치료로 끝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장기전을 각오한 셈이지요.
  • 조증에 대한 환상을 버렸습니다. '조증일 때의 내 모습이 진짜'이고, '경조증 상태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조증도 울증도 아닌 중간 상태가 정상이라고, 기준점을 새로 세운 것입니다.

 

치료를 시작했음에도 조증은 쉽게 잡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약 9개월 정도 지속했습니다. 비록 기간은 길었지만, 조증의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단번에 조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 정도로 유지하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심해어

 

<라이프 오브 파이 中>

 

깊은 해저에서 숨죽이고 있던 심해어는 어느 순간 날치로 변해 수면 위로 뛰어오르고, 암흑 뿐이었던 주위는 반사된 햇빛으로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또다시 돌아온 조증기엔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느낀 해방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약을 먹고 있어서인지, 끝을 모르고 기분이 뜨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을 감금했던 방에서 나와, 동네 음식점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집에 지냈던 터라 돈 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었습니다.

 

Daum 웹툰리그에 만화도 그려서 올렸습니다(<”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 바로가기>). 조울증 환자인 주인공이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조금씩 병을 극복해 가는 내용입니다. 소소하게 댓글과 추천이 달려서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우울증이 올 것 같은 기미를 느꼈고, 흐지부지되는 것보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재를 끝마쳤습니다.

조증기에 일을 벌이는 것은 쉽지만 잘 마무리하는 것은 대부분 어려웠던 것을 감안하면, 작지만 큰 발전인 셈인지도 모릅니다.

 

 

가벼운 우울감

 

다리에 심한 근육통이 생겨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배달을 하려면 오토바이를 타야 하는데, 오토바이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치료는 오래 걸리진 않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우울증이 왔습니다.

완전히 무력감에 빠질 정도의 심한 우울증은 아니어서, 과외는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증 상태라 가르치는 게 배로 힘들긴 했지만, 의욕적인 학생이 있어서(이 글을 처음 올린 뒤 다음 해쯤 이 학생이 성공적으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르치는 즐거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학생은 기특하기도 하거니와 실력도 금방 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울증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과외 준비를 하고 가르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 해 겨울은 그렇게 우울감 속에서 맞게 되었습니다.

 

 

경조증, 극조증, 우울증 - 급속 순환

 

 

 

연말이 다가오자 우울증이 경조증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 사업체의 간판 디자인과 홈페이지 작업을 하면서 해를 넘겼는데, 빠르게 경조증 상태가 됩니다.

급기야 조증이 되었고, 집안 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이럴 때는 대개 부모님과 심한 갈등을 겪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조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 여동생이 출장과 휴가를 겸해서 귀국했습니다. 동생은 제 상황을 보고는 캐나다에서 한동안 지내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저도 무척이나 그러고 싶었지만, 주치의의 만류(만약의 경우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했습니다.

 

조증이 지나가고 약 두 달간 심한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도 조증이 심했던 만큼 그 반작용으로 뒤따른 우울증도 심했습니다.

방 밖으로도 나가기가 싫어서 병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약을 먹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은 하면서도 병원 가는 것을 한없이 미루고, 그렇게 우울증이 끝날 때까지 약을 먹지 않고 지냈습니다.

 

 

또... 경조증

 

그러자 얼마 후 다시 경조증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스스로 상태 변화가 느껴지더군요. 언젠부터인지, 저는 조증기를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제가 언제 사고칠 지 모를 불안한 시기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울기보다 조증기가 더 두렵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조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한편으론 증상이 자꾸 반복되면서, 병원 치료뿐 아니라 병을 이기기 위한 다른 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활동 중 하나가 블로그를 개설한 일이었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조울증 관련 정보를 공유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조울증에 대해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울증은 상대적으로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도

 

최근에 우울증과 경조증이 또 한 번씩 지나갔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저처럼 조증과 울증이 단기간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흔한 케이스는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치료 방식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기분 변화를 잡아주는 리튬(전통적인 조울증 치료제) 농도를 기존보다 상당히 높여 보기로 한 겁니다.

사람마다 조울증의 증상과 정도 그리고 약에 대한 반응성도 제각각이다 보니, 딱 맞는 약의 조합과 농도를 찾는 게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치료 초기에는 실험용 모르모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과정을 받아들이고, 두 주에 한 번 있는 진료 때마다 리튬의 농도를 조금씩 높이며 경과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의사: "지난 2주는 어땠어요?"

나: "아직도 (기분이) 뜨고 있는데요... 리튬 농도를 더 높여야 하는 게 아닌지..."

의사: "좋습니다. 그럼 저녁 약에 리튬 300mg을 추가하죠. 혹시 어지러움증이나 메스꺼움 같은 부작용이 느껴지면 한 알을 빼고 드세요."

이번 시도는 어떤 결과를 내게 될까요? 성공할까요?

 

 

 

 

최근 저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조증의 변덕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일종의 '실험'입니다.

조증 시기엔 머리 회전도 빨라지고, 굉장히 활동적이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해내는 편이지만, 문제는 '끈기'입니다. 우울기가 오면 진행하던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시작한 일은 우울증 시기에도 충분히 할 수 일을만한, 머리 쓸 필요 없는 단순 노동입니다.

 

만약 또 증세를 잡지 못해 다시 우울기가 올 경우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생각입니다.

정기적인 수입이 생긴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사실 일이란 게 돈 벌려고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제 경우 너무 오랫동안 수입이 일정치 않거나 전혀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병원비와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한편 이 일은 조울증 환자인 제게 잘 맞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볍게 몸을 쓰는 일이라,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걱정이 적습니다. 적당히 운동도 되니까 밤에 잠도 잘 옵니다.

다만 오랜만에 풀타임으로 일을 하는 것이 좀 고역입니다. '매일 출퇴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휴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기도 합니다. 쉬는 날이 어쩜 이렇게 꿀맛 같을까요.^^

늦잠을 자고,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며 글을 쓰는 것은 빼먹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취미로 코딩(=프로그래밍)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요즘은 배우기 쉬우면서도 활용도 높은 프로그램 언어가 많고, 게다가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코딩 공부에는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코딩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반복 작업에 활용하거나 간단한 앱을 만드는 정도까지는 공부해 보려 합니다.

장기적인 목표 중에, <eMoods>와 같은 조울증 관리 앱을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그러고 보니 '이런 앱을 만들고 싶은데 이미 있지 않을까?' 하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앱이 <eMoods>였고, 앱 번역에 참여한 일도 있었네요). 우리말로 된, 우리 실정에 맞는 조울증 관리 앱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글을 마치며

 

'자 보세요! 저는 이렇게 조울증을 멋지게 이겨냈습니다!'

...이런 결말을 기대하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 조울증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 다른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삶의 목적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과도한 의미를 붙이지 않게 되면 좀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 최근에 읽은 책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불분명한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살아가는 것,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말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삶을 되도록 단순하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조울증 환자의 경우 삶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복잡해지기 쉽고, 그렇기에 복잡한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조울증 치료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조울증 치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쉽게 그 끝이 보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적어도 전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울증과 함께 하는 삶 역시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조금 (때때로 많이) 불편하고, 때로는 열 받고, 가끔은 슬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울증 때문에 겪었던 그 수많은 우여곡절 역시 치료 과정의 일부이며, 반드시 도움이 될 때가 올 겁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지금 이 순간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울증 환우 그리고 가족 여러분.
'힘내', '화이팅', '넌 할 수 있어'... 이런 말 너무 많이 들으셨죠?

전 반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힘을 빼세요!', 라고 말입니다.

힘을 빼야 끊임없이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유연하게 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파도를 프로 서퍼처럼 잘 타도록 해 보자고요!

때로는 작게, 때로는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능숙하게 타고 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