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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울증 치료기

조울증 재발을 방지하려면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2009년에 처음으로 조울병 진단을 받은 후 어느새 만 12년이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이 병을 웬만큼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긴장을 푼 순간 조증과 우울증이 또다시 삶의 한 시기를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정말 못해먹겠다.'

우울한 시기 동안에는 솔직히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요즘은 오랜만에 조증도 우울증도 아닌 편안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지난 12년의 기록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상당히 심한 조울증 주기가 10번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 1년에 한 번은 조증과 우울증을 겪었던 셈입니다. 이러다 보니 생활에 연속성이나 안정감이 생기지 못했고, 그건 일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에게 조울병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꽤 병식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기분 변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처방약도 먹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상담치료를 열심히 받았는데도 왜 자꾸 재발하는 것일까요?

 

일단 제 조울증 주기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울증에서 조증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변화를 느끼자마자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지만 얼마 후 경조증 상태에 접어들고, 곧이어 조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증 끝에는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증과 우울증을 세트로 묶어서 아예 하나의 '시즌'으로 부릅니다.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깊고 긴 우울기를 지내다가 한참이 지나면, 또 어느 순간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깁니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시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리하여 조증이 오기 전에 증상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당연한 결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조울 1형인 제 경우에는, 일단 조증 상태가 되면 그다음에 반드시 우울증이 따라왔기 때문에, 조증을 방어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 1 - '생각의 덫'을 피하기

조울증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데에는 생리적인 측면 외에, 제 성격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생각(혹은 아이디어)에 집착하는 성향이 기본적으로 강한 데다가, 조증 상태에선 이런 강방적인 면이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리고 맙니다.

 

생각의 덫(생각이 무한 반복되는 상태)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적게, 느리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맴돈다 싶으면 그 생각을 바로 중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평소 자신의 내면을 잘 관찰하고 있으면 이렇게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물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한데, 제가 사용하는 요령은 주로 다음 두 가지입니다.

 

  •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그 횟수를 15~20까지 셉니다(시각 정보를 차단하고 호흡하는 ‘감각’에 자체에 집중합니다).
  • 가만히 있기 어려울 때는, 방이나 집 안을 천천히 걷는 것도 좋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멀티태스킹을 피하고 행동을 느긋하게 하도록 합니다. 우울증을 막 벗어났을 때 그동안 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을 해 내려는 마음이 급해 이것저것 할 일들에 관한 생각이 끊임없이 들고, 한 가지 행동을 끝내자마자 다음 할 일을 연달아하기도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하나씩 마무리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일부러 미뤄 보기도 합니다. 할 일을 잊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말고, ‘중요한 일이면 어쨌거나 생각나겠지’라는 식으로 마음을 편히 먹습니다.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 2 - '지루함'에 익숙해지기

지루함을 참다 보면 무척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깨어있는 동안에 우리는 거의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 틈만 나면 어느새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터넷, 유튜브, SNS, 게임 등을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 지 오래입니다. 아마도 자극을 갈구하는 뇌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아서가 아닐까 합니다.

 

저의 조울증 뇌는 특히 과도한 자극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경조증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자극 행동은 습관성도 강해서 나도 모르게 반복해서 하게 됩니다.

때문에 뇌가 휴식할 수 있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또한 쉽지는 않기 때문에 요령이 필요합니다.

 

  •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를 정해서 그 시간을 조금씩 늘려 봅니다. 저는 주로 식사 후와 잠자기 전을 '지루함의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 지루함 때문에 생기는, 불편한 내면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껴 봅니다. 처음에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 명상이나 가벼운 산책이 도움이 됩니다.

의도적으로 지루함의 시간을 갖게 두면 뇌 휴식이라는 측면 외에도 또 다른 이점이 있습니다. 낭비되지 않은 정신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다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등 필요할 때 집중력을 발휘하기가 더 쉽다는 점입니다.[각주:1] 습관화하려면 제법 노력이 필요하지만, 산만해지기 쉬운 조증기의 대처법으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생산력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Good Luck!

개인의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운이 크게 좌우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행운을 빈다'는 말은, '네 손이 닿지 않는 그런 일들도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많은 분들께, 그리고 새로운 시즌을 맞는 저에게도 행운을 빕니다.

 

 

 

 

  1. 칼 뉴포트, 딥 워크(민음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