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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 이야기

수면과 꿈, 그리고 조울증

수면의 과학

렘수면(Rapid Eye Movement sleep)은 문자 그대로 수면 중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관찰되는 시기를 말하고, 이때 우리는 꿈을 꾸게 됩니다. 잠잘 때 뇌가 휴식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뇌의 활동량도 많아집니다.
반대로 논렘 수면(Non-REM sleep)은 렘수면이 아닌 수면 주기를 말하며, 뇌의 활동이 아주 적어지는 시기입니다.

 

꿈과 조증

조증이 아주 심할 때 기록한 일기가 이 글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증 시기에 했던 행동과 느꼈던 감정이 기록에 그대로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심한 조증 상태임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제 감각으론 나름대로 통제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정상 상태일 때 일기를 읽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말과 행동이 심했다는 것을 알고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많이 느끼듯, 조증 시기의 제 언행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 것은 물론이고요.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넘겨 버리기 전에, 그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증 시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조증기에 잠을 잘 자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는데, 뇌의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조증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조증과 수면, 그리고 꿈 사이의 재미있는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블로그에 정리해 두자 싶었습니다.

 

조증 때 감정의 여과 없이 나오는 말과 행동들은, 정상인 시기나 우울기에 되돌아보면 괴로울 만큼 부끄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꿈을 꿨는데 그 내용이 남에게 말 못 할 만큼 민망한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또 꿈을 꿀 때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자각몽은 논외로 한다면요), 조증 때도 스스로 조증 상태인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점이 꿈꿀 때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꿈을 꾸는 렘수면 시 뇌가 많이 활성화된다는 것도 조증과의 공통점입니다.

 

조증과 창의성

일반적으로 경조증을 넘어 조증 상태가 되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과 과도한 활동으로 산만해져서, 오히려 창의성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조증이 심하지 않은 경조증 시기에는 실제로 창의성, 생산성이 높아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는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많이 보고된 현상입니다.[각주:1]

꿈을 꾸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일화들을 많이 접하곤 하는데, 이것은 마치 경조증 시기에 창의성이 높아지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점이 조증 상태를 꿈에 비유하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꿈 또는 경조증의 시기의 뇌는 굉장한 속도와 효율성으로 정보들을 연결하는데, 이것이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관계가 없는 정보들을 연결 짓기 시작하면, 망상이 되어 심각한 문제가 될 여지도 있습니다. 이런 뇌 생리학적 원리는 조증기에 흔히 나타나는 관계 망상, 종교 망상 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수면의 중요성

지금까지의 논리대로라면, 조증 상태는 마치 잠든 채 꿈꾸는 대로 행동을 하는, 몽유병 상태와도 비슷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할 만한 생각과 말, 행동이라면 당연히 잘 때 하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현재 조증 때문에 통제가 잘 안 되고 잠을 못 자는 상태라고 느낀다면, 강제로라도 잠을 자야 합니다. 약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많은데, 저녁 약에 주로 들어있는 신경 안정제와 수면 유도제가 수면의 질과 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좋은 꿈 꾸세요

조증이 꿈꾸는 것 같은 상태라고 생각해 보시면, 지난 조증기의 실수 때문에 괴롭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이런 식의 정신 승리는 건강한 사고방식 아닐까요? 물론 이 글 역시 어쩌면 경조증식 관계 짓기 성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약 잘 챙겨 먹고, 잠도 푹 잘 자고, 꿈은... 잘 때만 꾸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1. Kay Redfield Jamison, Touched with Fire, Free Press Pape. [본문으로]